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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CM협회 창립 30주년, 건설업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CM의 시대적 소명

작성자: 온정권 ㈜무영씨엠건축사사무소 회장 등록일: 2026-09-01 조회: 22

● 폐허에서 세계로 — 한 세대의 압축성장


한국이 해방 이후 걸어온 길은 인류 경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야기다. 1953년 한국전 정전 직후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고, 나라 살림은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기댔다. 이 시기 정부는 원조로 들어온 원료를 가공해 밀가루·설탕·면직물을 만드는 이른바 '삼백 산업'으로 근근이 자립의 밑거름을 쌓았을 뿐이다.


전환점은 1962년이었다.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가동하며 수출 주도 산업화의 시동을 걸었다. 문제는 종잣돈이었다. 자본도 자원도 없던 나라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 서독으로 떠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송금한 외화, 그리고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특수를 밑천 삼아 투자 재원을 마련했다. 여기에 '교육입국'으로 길러낸 근면한 인적 자원이 더해지면서, 가발과 섬유를 만들던 경공업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계기로 철강·조선·석유화학·자동차 산업으로 빠르게 고도화됐다.


이 도약의 물리적 통로를 연 것이 건설이었다. 1968년 착공해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하루 생활권으로 묶으며 국토를 하나의 경제 단위로 통합한 대동맥이 되었고, 같은 해 첫 삽을 뜬 포항종합제철(1973년 1기 준공)은 '산업의 쌀'인 철강을 국내에서 조달할 길을 열었다. 성장의 엔진을 얹을 차체가 이때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련도 있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는 유가를 네 배 가까이 끌어올리며 비산유국 경제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위기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다. 오일머니로 넘쳐나던 중동이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 나서자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시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1976년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건설로 불렸고, 중동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는 오일쇼크가 부른 국제수지 위기를 방어했을 뿐 아니라 중화학공업을 키우는 재원으로 되돌아왔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의 충격 속에서도 이 해외 건설 특수는 한국 경제를 지탱한 버팀목이었다.


이렇게 다져진 토대 위에서 한국 경제는 1980년대 후반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호황'을 타고 다시 도약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그 성과를 세계에 각인했다. 이후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그리고 주요 시장과의 잇단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거치며, 한국은 마침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적 무역 강국으로 올라섰다. 이 거대한 압축성장의 서사 속에서, 다른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었다면 그 엔진을 얹고 달릴 물리적 '차체(토대)'를 실제로 지어 올린 산업이 바로 건설업이었다.


● 아파트라는 주거 혁명, 그리고 도시정비사업의 도래


경제성장은 한국인의 주거 양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리며 주택난이 국가적 난제가 되자, 건설업은 한정된 토지에 다수를 수용하는 '아파트'라는 해법을 내놓았다. 1962년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고층 아파트도 중산층의 선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면서, 아파트는 점차 근대적 생활의 상징이자 새로운 주거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파트의 대량 공급을 뒷받침한 제도적 장치가 택지개발지구였다. 1980년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을 근거로 정부는 도시 외곽의 넓은 땅을 한꺼번에 사들여 기반시설과 함께 대규모 단지를 조성했다. 1980년대 개포·고덕·목동·상계 등지에 들어선 대단지 아파트가 그 산물이며, 이 공영개발 방식은 짧은 시간에 방대한 주택을 쏟아내는 '한국형 대량 공급'의 틀이 되었다.


그 정점이 노태우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이었다. 급등하는 집값과 주택난에 대응해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내걸고, 1989년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수도권 1기 신도시 조성을 발표했다. 1991년부터 입주가 시작된 이 신도시들은 규격화·표준화된 대량 생산 공법과 함께, 아파트를 명실상부한 국민 주거의 표준으로 완성했다. 200만 호 공약은 계획보다 앞선 1991년 말 214만 호로 조기 달성됐다.


그 결과는 오늘의 통계로 확인된다. 국토교통부의 《2025 주택업무편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 가구는 약 2,300만 가구에 이르며, 이 가운데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구가 1,202만(53.9%)으로 가장 많다. 단독주택 거주 가구가 618만(27.7%), 연립·다세대가 246만(11.0%)으로 뒤를 잇는다. 아파트 거주 비중은 2015년 48.1%에서 꾸준히 높아졌으며, 1인 가구가 전체의 36.1%를 차지하고 평균 가구원 수가 2.19명으로 줄어드는 가구 구조의 변화 속에서도 아파트는 여전히 압도적인 주거 형태다.


그러나 한 세대 전에 쏟아진 아파트들이 이제 일제히 준공 30년을 넘기며 노후화의 궤도에 들어섰다. 도심에는 더 이상 새 단지를 지을 빈 땅이 없다. 주택 공급의 무게중심은 빈 땅에 짓는 신규 분양에서, 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는 재건축·재개발, 즉 도시정비사업으로 옮겨갔다. 2002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제정으로 그 절차가 체계화되면서, 정비사업은 대도시 주택 공급의 핵심 축으로 떠올랐다.


무대가 바뀌자 자본과 경쟁도 이 시장으로 집중됐다. 신규 택지가 줄어든 대형 건설사들은 정비사업 수주에 사활을 걸었고, 하이엔드 브랜드를 앞세운 수주 경쟁은 갈수록 치열하고 고도화됐다. 최근 10년의 정부 정책은 이 흐름을 더욱 가속했다. 문재인 정부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시행(2018년)과 안전진단 강화, 분양가상한제 확대로 재건축을 억제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방향을 틀어 안전진단 완화와 재초환 부담 완화, 그리고 노후 아파트가 밀집한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노후계획도시 정비 특별법」(2023년 제정)과 '1·10'·'8·8' 대책 등 재개발·재건축 활성화 기조를 잇달아 내놓았다. 인허가 절차를 통합해 사업 기간을 대폭 단축하려는 촉진책까지 더해지면서, 정비사업은 규모와 속도 양면에서 유례없이 팽창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 압축성장의 그림자 — 참사와 정경유착의 계보


역설은 여기에 있다. 이토록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에도 건설업은 좀처럼 존경받지 못했다. 단기간에 최소 비용으로 최대 성과를 내야 했던 압축성장의 기조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의 씨앗을 곳곳에 심었다. 권력과 자본의 유착, 그리고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안전과 견제 장치는 번번이 무력화됐다.


그림자는 이르게 드리웠다. 1970년 4월 서울 마포 와우시민아파트가 준공 석 달 만에 무너져 34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무면허 업체에 준 불법 하청과 공사비 착복, 부족한 철근, 단 6개월의 공기가 부른 최초의 대형 인재였다.


1990년대 초 건설 붐은 부패와 부실을 동시에 키웠다.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에서는 한 건설회사가 공영개발 원칙을 무너뜨리려 청와대 비서관과 여야 의원, 고위 관료에게 150억 원대 뇌물을 뿌렸고, 서울시장이 경질되는 총체적 정경유착으로 번졌다. 같은 해 1기 신도시에서는 골재가 고갈되자 염분을 씻지 않은 바닷모래가 콘크리트에 무단 투입돼, 조사 대상 690개 동 가운데 34.3%인 237개 동에서 기준치를 넘는 염분이 검출됐다. 자재 반입을 통제할 감리가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누적된 '빨리빨리'는 결국 연쇄 참사로 터졌다. 1993년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28명 사망)와 부산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78명 사망·198명 부상)이 잇따랐고, 1994년 성수대교가 용접 불량과 유지관리 방기 속에 끊어져 32명이,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불법 증축과 철근 삭감, 옥상 냉각탑 하중이 겹쳐 붕괴하며 502명이 목숨을 잃고 937명이 다쳤다. 이 참사들은 1995년 시설물안전관리특별법과 재난관리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계보는 끊기지 않았다. 해운대 엘시티와 성남 대장동으로 대표되는 개발 게이트가 인허가 특혜와 개발이익 사유화의 민낯을 드러냈고, 2021년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는 다단계 불법 하도급으로 공사비가 3.3㎡당 28만 원에서 4만 원대까지 깎이면서, 무너진 건물이 시내버스를 덮쳐 9명이 숨졌다. 이듬해 같은 시공사가 짓던 광주 화정 아이파크는 무단 공법 변경과 동바리 조기 철거, 기준 미달 콘크리트가 겹쳐 16개 층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6명이 희생됐다. 이 참사는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당겼다. 그리고 2023년 인천 검단 안단테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전단보강근 누락으로 붕괴하고, 뒤이은 조사에서 20여 곳의 LH 발주 아파트에서 철근 누락이 무더기로 드러났다.


이 오랜 그림자의 뿌리는 하나로 모인다. 발주자가 무엇을 얼마에 짓는지 모른 채 사업을 시공자에게 통째로 맡기는 '정보의 비대칭'이다. 그 위에서 부실과 분쟁, 불신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 감리는 왜 막지 못했나 — 감리제도의 진화와 한계


반복된 참사는 역설적으로 감리제도를 진화시킨 동력이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만 해도 독립적인 감리는 사실상 없었다. 1962년 건축법과 1963년 건축사법으로 건축사가 도면대로 시공되는지 확인하는 장치가 있었으나 소극적 수준에 머물렀고, 공공부문은 공무원이 감독을 전담해 기술적 품질 통제가 어려웠다. 전환점은 1986년 독립기념관 화재였다. 공무원 감독의 한계가 드러나자 1987년 건설기술관리법이 제정되며 공공건설공사에 전문 민간 감리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연쇄 참사가 정점에 이른 1990년대 중반, 제도는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다. 1994년 건설기술관리법 전면 개정으로 감리원에게 공사 중지·재시공 명령권을 부여한 '전면 책임감리제도'가 도입됐고, 같은 해 주택건설촉진법 개정으로 사업주체가 아닌 지자체가 감리자를 지정하고 감리비를 예치하는 주택감리제의 방향이 마련됐다. 이후 2015년 무렵부터 허가권자 지정 감리 대상도 단계적으로 확대됐다.


그럼에도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아파트에 적용되는 주택법 감리가 배치된 검단과 광주 현장조차 참사를 막지 못한 이유는, 감리제도에 내재한 두 겹의 한계에 있다. 첫째는 독립성의 결여다. 오랫동안 감시 대상인 시공사가 감리자를 선정하고 보수를 지급하는 '시공사의 을' 구조였고, 지자체 지정과 감리비 예치가 도입된 뒤에도 인적 네트워크 앞에서는 무력했다. 검단 사고가 그 전형이다. 퇴직자들이 임원으로 포진한 설계·감리 업체가 공공 용역을 싹쓸이한 이른바 'LH 전관 카르텔' 속에서, 일부 감리원이 주철근 누락을 발견해 재시공을 요구했지만 압박에 밀려 묵살당했고 끝내 감리단장이 해임됐다. 둘째는 시야의 한계다. 감리는 '도면대로 시공되었는가'를 시공 단계에서 사후·수동적으로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설계 단계에서 이미 발생한 전단보강근 누락 같은 구조적 결함을 걸러내지 못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시공 단계의 수동적 파수꾼을 넘어, 기획·설계부터 시공과 사후관리까지 전 생애주기를 통합 관리하는 건설사업관리(CM)다. 현행 「건설기술 진흥법」에서 명칭이 CM으로 통합되긴 했으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전방위 품질 통제와 BIM·데이터 기반의 스마트 건설(Smart CM) 기술이 실질적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아울러 감리의 경제적 독립성을 완전히 보장하기 위해 공공 신탁기관이 감리비를 직접 지급하는 제도를 전면 확대하고, 공공기관 전관의 재취업과 입찰 참여를 원천 차단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흔들림 없이 시행해야 한다. 시공 단계에 머무는 감리와 달리, 프로젝트 전반을 아우르는 관리자인 CM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 자본이 몰려드는 무대, 그러나 약자인 조합


그 CM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무대가 바로 도시정비사업이다. 건설 경기가 얼어붙을수록 이 시장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진다. 고금리와 공사비 급등, 신규 분양 위축으로 빈 땅에 짓는 사업의 수익성이 나빠지자, 노후 아파트의 재정비 시기가 도래하고 인허가 완화 정책이 이를 뒷받침하는 재건축·재개발로 건설 자본이 대거 몰려든 것이다. 2026년 상반기 10대 건설사의 도시정비사업 누적 수주액은 약 27조 원에 이르렀고, 그중 현대건설·GS건설·삼성물산 이른바 '빅3'가 약 20조 원, 전체의 73%를 가져갔다. 서울 강남과 한강변 핵심 사업지를 향한 대형사 쏠림이 그만큼 뚜렷하다.


그런데 이 거대한 시장의 진짜 주인은 자본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주민 곧 조합이다. 여기서 거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수천억에서 수조 원이 오가는 정비사업의 발주자인 주민은 철저한 건설 비전문가인 반면, 상대인 시공사는 수십 년간 수백 건을 수행한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다. 게다가 공사비 급등으로 건설사들이 출혈 경쟁을 피해 선별 수주에 나서면서, 경쟁 입찰이 무산되고 특정 시공사와 단독으로 계약하는 '수의계약' 사업장이 늘고 있다. 경쟁이 사라진 협상 테이블에서, 전문성 없는 조합이 시공사의 공사비 요구나 불리한 계약 조건을 방어할 힘은 극도로 취약해진다. 발주자와 시공자 사이의 이 정보 비대칭이야말로, 오늘날 전국 정비사업장을 뒤덮은 공사비 갈등과 소송전의 근본 원인이다.


제도의 변화는 이 비대칭을 더 키웠다. 서울시는 신속통합기획 등 인허가 패스트트랙을 도입하고, 2023년 12월 조례 개정으로 시공자 선정 시점을 사업 초기인 '조합설립인가 이후'로 대폭 앞당겼다. 도심에 주택을 빨리 공급하려는 취지지만, 주민에게는 설계조차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공자부터 뽑아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됐다. 압축된 일정 안에서 시공사가 제시하는 방대한 설계안과 계약 조건, 수천억 원의 공사비 내역을 비전문가인 주민이 꿰뚫어 보기란 불가능하다. 압구정·여의도·목동·성수 등 서울의 대형 정비사업장에서 CM 도입이 예외가 아닌 '필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CM은 주민에게 없던 '전문가의 눈'과 '협상의 무기'를 쥐여주어, 약자였던 주민을 당당한 협상의 주체로 뒤바꿔 놓는다.


● 세계는 이미 다르게 짓는다 — 선진 사례와 스마트 건설


시야를 넓히면, 건설 선진국은 CM을 훨씬 앞서 발전시켜 왔다. 미국에서는 시공책임형 CM(CM at Risk)이 공공·기관 프로젝트의 보편적 발주 방식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CM이 설계 초기부터 참여해 시공성을 검토하고, 최대보증공사비(GMP)를 제시해 원가와 공기에 책임을 지며, 최저가가 아닌 자격과 실적으로 선정되는 방식이다. 미국건설관리협회(CMAA)는 이를 전문 직능으로 체계화했다. 영국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발주청(ODA)이 세계적 CM·엔지니어링 기업 연합을 '딜리버리 파트너'로 삼아 기획 초기부터 통합 팀을 꾸리고 협력형 계약과 절감 이익 공유를 도입해, 중대재해 없이 예산을 절감하며 기한 내에 완수했다.


반면 국내 CM은 오랫동안 감리 제도에 흡수되며 시공 단계에 편중되어, 설계 이전에 개입해 가치를 창출하는 본연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이 격차를 메울 열쇠가 스마트 건설 기술이다. BIM과 디지털 트윈으로 설계 간섭과 구조 결함을 착공 전에 시뮬레이션하고, 축적된 데이터와 AI로 방대한 공사비 내역과 계약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 '경험과 감(感)'이 아니라 데이터로 신뢰를 증명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이야말로 다음 시대 CM의 역할이다.


● 다음 30년, 관리자에서 신뢰의 설계자로


한국에 CM 제도가 뿌리내린 지 어느덧 30년, 한 세대가 지났다. 그 시간은 곧 한국 건설업이 '불신'이라는 그림자를 넘어서기 위해 분투해 온 역사였다.
소수 자본이 주도하던 시장은 이제 주택의 63%를 차지하는 아파트들이 노후화되며 주민이 중심이 되는 거대한 전환을 맞았다. 사후 검사에 머문 감리와 극심한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전문 지식이 부족한 다수 국민이 평생 일군 자산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방어하고 조율하는 일 — 그것이 이 시대가 CM에 부여한 소명이다.
앞으로의 30년, CM은 단순히 도면을 보고 현장을 '관리하는 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첨단 데이터와 기술로 무장해 발주자의 이익을 지키고, 나아가 건축물과 도시에 대한 공공의 가치까지 지켜내는 '신뢰의 설계자'로 거듭나야 한다. 과거 한국 경제가 폐허에서 세계로 도약하는 데 건설업이 물리적 뼈대를 세웠다면, 이제 그 건설업을 국민이 믿고 존경할 수 있는 투명한 산업으로 재건하는 이정표는 바로 CM이 세우게 될 것이다. 한국CM협회 창립 30주년은, 그 눈부신 다음 세대를 향한 위대한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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